친구의 화실에 잠시 들렀을 때, 가을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친구가 기다렸다는 듯이 봉투에 담긴 책을 선물해 주셨어요. 책을 읽는 동안은 표지만 구경하다가, 열흘 정도 걸려서 첫 페이지를 열고 마지막 페이지를 닫았어요. 조금씩 나눠서 읽는 습관이 있어서 그 속도가 엄청난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책인 '폭풍의 언덕'은 내가 기대한 내용과는 많이 달랐어요. 내용은 막장이고, 등장인물들은 내 가치관과 맞지 않는 해괴한 인물들이었어요. 책에서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처절한 사랑을 다루고 있는데, 전혀 그런 점을 찾을 수 없었어요. 사랑은 없었고, 있더라도 유년시절의 철없는 추억과 극도로 불안정한 정서와 정신질환적인 집착으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남녀사랑에 대한 정의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나로서는 상호간의 정서적 교류와 서로의 존재가 각자의 인생에 영향을 주어야 하며, 가능하다면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성숙함을 거쳐 궁극적으로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깨닫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조금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는 평범한 연애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겪는 일이에요. 그런 면에서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병적인 집착과 그릇된 가치관을 사랑이라고 믿고, 사실상 연애조차 하지 않은 채 복수에 몰두하는 인물이에요. 그것도 상대방에게 큰 잘못이 없는데, 그냥 악당이 되고 싶은 듯한 모습이었어요. 하지만 집착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을 것 같아요. 그들이 대체 언제 연애를 했는지 의문이 들었어요. 게다가 캐서린 유령이 18년 동안 계속 따라다닌다는데, 이미 그것만으로 맛이 갔을 텐데요.
히스클리프와 딘 부인을 제외한 인물들의 우유부단한 성격은 정말로 황당하게 느껴졌어요. 그들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더 풍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자신과 가족의 인생이 망가지고, 아무런 책임감이 없고 절제하지 못한 환경에 버려진 어린 아이들은 아동학대로 인해 고통받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우유부단함과 체질로 인해 건강이 약해져서... 제 명에 사는 사람들이 차례대로 쓰러지고, 대부분이 앓다가 돌아가는 일이 벌어졌어요. 당시 의학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고 병원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들의 성격과 체질은 히스클리프의 광기 양성기질과 잘 맞아서 그가 몇 번이나 인생을 망치는 일에 큰 공헌을 했을 것으로 확신해요.
사실상 진정으로 자아실현을 성취한 사람은 히스클리프 한 명뿐이에요. 그는 성공한 미꾸라지인 셈이에요. 하지만 그렇다면 건강하게 살아갈 텐데, 결국에는 헛소리를 중얼거리다가 요절하고, 결말은 캐서린의 딸과 조카가 이어지면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요. 책을 다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방해꾼도 사라지고 해피엔딩이 되길 바랄 뿐이지만, 이 내용대로라면 분명히 그들도 요절할 것이에요. 부모가 4명 다 사망하고 친족 결혼으로 인해 면역력도 결핍되었으니, 찬바람만 불면 쓰러질 확률이 매우 높지 않을까요... 우연인지 필연인지 작가는 이 책을 마무리한 뒤 1년 뒤에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했다고 합니다.
번역의 매끄러움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쉬운 말조차 어렵게 번역되는 경우도 있었고, 구어체임에도 불구하고 철학적인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영어를 모르는 저로서는 직접 비교할 수는 없지만, 조금 더 의역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되었습니다. 고전 소설은 매끄러운 번역을 하기 어려운 작업인 것 같습니다. 마치 성경을 읽을 때 영어로 읽는 것이 더 쉬운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할까요? 당연한 얘기이지만, 영어를 잘 한다면 영미 소설은 원문으로 읽는 것이 훨씬 유익할 거라고 생각해요.
역자도 많은 의역이 포함되었다고 설명했지만, 저는 그보다 더 많은 의역이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하녀 딘이 손님에게 자신이 섬겼던 주인들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전해 듣는 이야기라면 더욱 매끄러운 전개가 자연스럽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게다가 303페이지에는 오타도 있었습니다. 으앙... 독후감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며, 좋은 고전 소설을 만나게 해준 친구에게 감사하며, 전부터 읽어보고 싶었던 다른 책들도 적극적으로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은 평범한 사람이 어려움을 극복하며 자아실현하는 내용이나 악한 인물이 등장하더라도 자아실현을 다루는 내용으로 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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